판단을 외주화하지 않기
요즘은 무엇이든 물어보면 답이 나온다. 코드의 버그도, 저녁 메뉴도, 심지어 인생의 방향까지 AI에게 물으면 그럴듯한 대답이 돌아온다. 편리하다. 그런데 편리함이 쌓일수록, 한 가지가 조용히 줄어든다. 스스로 판단하는 힘이다.
판단은 근육과 같아서, 쓰지 않으면 약해진다. 작은 결정을 자꾸 남에게 맡기다 보면, 정작 중요한 갈림길 앞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스스로 감을 잡지 못하게 된다.1 답을 받는 일과 판단하는 일은 다르다. 답은 결과지만, 판단은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드러낸다.
물론 도구의 도움을 받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계산기가 암산을 대신해도 우리는 여전히 수학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이해를 건너뛰고 결론만 가져올 때다. AI가 내놓은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그 답이 왜 맞는지, 어디서 틀릴 수 있는지를 영영 모르게 된다.2
그래서 나는 AI에게 답을 구하더라도, 그 답을 한 번 더 의심하는 습관을 들이려 한다. 이 결론은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는가. 반대편의 가장 강한 주장은 무엇인가.3 내가 직접 따져본 뒤에야, 그 답은 비로소 내 것이 된다.
도구가 똑똑해질수록 사용자에게 요구되는 건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나은 판단이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흘려보낼지 고르는 일, 그것까지 외주화하는 순간 우리는 도구의 주인이 아니라 도구의 통로가 된다.
좋은 도구는 답을 대신 내려주는 도구가 아니라, 내가 더 잘 판단하도록 돕는 도구다. 나는 그런 자리에 서 있고 싶어요.
주
-
인지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적 부하 떠넘기기(cognitive offloading)'와 맞닿아 있다. 기억·계산·판단을 도구에 위임할수록 스스로 수행하는 능력은 줄어든다. ↩
-
자동화된 시스템의 출력을 과신하는 경향을 '자동화 편향(automation bias)'이라 부른다. 개념 설명: https://en.wikipedia.org/wiki/Automation_bias ↩
-
상대의 주장을 가장 강한 형태로 재구성해 따져보는 '스틸맨(steelman)' 태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과도 통한다. ↩